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여름의 끝자락에 날마다 새로운 그림을 선사하던 뭉게뭉게 흰 구름들은 자취를 감추고 끝없이 뻥 뚫린 듯한 하늘이 이젠 나의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라며 자리를 내어 준 듯합니다.
사색을 하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테죠. 그러려면 시간의 여유도 필요할 테고요.
어쩌면 물질적인 여유도 있어야 사색도 가능하지라며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 입니다.
여유란 단지 한 부분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생각에 따라 필요한 여유들이 다 다를 것이고 어쩌면 같은 상황이라도 성격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여유를 만드는 일, 스스로의 마음에 틈을 내는 일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다. 쉬는 것이 죄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유를 능동적으로 찾는 일은 언뜻 뒷걸음질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유를 낼 때에야,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한발 물러섰을 때에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는 일도, 나 자신을 들여 다 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오은, 다독임 p.111-
여유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여유의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등의 문제가 그 사람의 취향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만약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으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여러 가지가 많겠지만 많은 분들이 ‘여행’이라고 답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단연코 여행입니다.
어렸을 때 집에 세계여행전집이 있었습니다. 심심할 때면 이국적인 화보가 가득한 책장을 넘겨 보며 언젠가 이 곳을 직접 가봐야겠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는 교과서와 함께 받은 사회과부도를 심심할 때마다 들여다 보며 웬지 마음이 설레이곤 했었죠. 지구에 태어난 이상 내가 사는 곳을 벗어나 세계 곳곳에 나의 발길을 남기리라 즐거운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친구들은 지리시간을 지루해 했지만 저는 세계 곳곳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 대해 배우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엔 자유로운 세계여행이라는 것이 상상 속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해외여행이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불가능한 시절이었죠. 1989년에 해외여행 자유화의 시작으로 저에게도 어렸을 때의 상상이 실현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던 저에게는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선 돈보다도 여유있는 시간이 문제였습니다. 여름에 주어지는 짧은 휴가는 어렸을 때 꿈꾸던 해외여행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어떤 이는 돈이 없어서, 어떤 이는 시간이 없어서 라고 말합니다.
여행과 여유, 물질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가 함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래전 가끔 시내에서 우연히 말을 주고 받게 되는 외국 여행객들과 얘기 나누다 보면 보름, 한 달 동안 여행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가능해? 속으로 놀라며 부러워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면서 예전보단 긴 휴가를 내는 일이 가능해졌지만
성장제일주의 경쟁사회였던 한국 사회를 살아내 온 우리 세대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했던 아니 여행다운 여행을 불가능하게 했던 이유는 바로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해외여행자유화 초기 사실상 장기여행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일주일 만에 유럽일주, 여행을 일하듯,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 가듯 해냈습니다. 그것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국가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스케줄로 만들어진 패키지여행에 합류하여 돌아보는 것이 가장 여행을 잘하는 법이라고 여겨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지에서 마다 열심히 방문 증명사진을 찍어대느라 증거는 넘치나 감성은 부족한 그런 여행을 해왔습니다.
시간이 허락한 여행다운 여행을 하기가 어려운 시절을 우리는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지난 시간과 나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를 충분히 들여다보고 또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그런 여유가 충만한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나는 여유를 내서 딴생각을 하고 글을 써왔다. 스스로에게 본래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에 나를 분명하게 각인하는 일, 마침내 삶이 희미해지지 않게 하는 일, 나는 이것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서서 만드는 여유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내가 현재 누리는 여유에 마땅한 이유를 찾아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오은, 다독임 p.112 -
짧은 시간 최대한 많은 것을 봐야할 것 같은 여유 없는 여행이 유행이었던 과거를 지나 이제는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최대한의 여유 속에 빠트려 과연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진정한 자아를 찾는 여유 있는 여행이 대세입니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와 같은 머무는 여행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면서 일과 주변을 챙기느라 바삐 살아왔던 일상이 점차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나이듦이 오히려 행복함으로 다가옵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세월이라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행을 위한 여유를 한껏 누려보면서 말입니다.
힘든 코로나시대를 벗어나 여행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제가 좋아하는 도시에서 한 달 쯤 머물면서 자발적으로 나서서 만드는 여유를 통해 나를 찾는 이유있는 여유를 누려보고 싶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우리 가까이 와 있기를 바래 봅니다.
오늘도 '이유있는 여유' 즐기시는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안녕~
from: J.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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